찢긴 날

[오르히카] 새벽 안개 속의 본문

FF14

[오르히카] 새벽 안개 속의

motschi 2017. 3. 31. 06:18

* 3.0 창천의 이슈가르드 스포 주의




그가 사랑한 이슈가르드가 부옇게 지워진 안개 속이었다. 눈은 그쳤지만 꼭 눈발 같은 새하얀 노이즈였다. 입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비현실감의 한가운데에 가장 믿지 않으려 했던 비석만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넘겨짚어 위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상냥하게도, 이런 날씨 속에서도 길을 잃지 말라고…….’라고 말할 만하다. 실제로 어제인지 그저께인지에도 타타루가 그렇게 말했고, 어떻게든 힘이 되어 주려는 어린 라라펠의 말에 모험가는 옅게 웃어주기만 했다.

글쎄, 네 비석을 찾아가는 길까지 밝혀 주려고?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 한심함에 모험가는 보는 눈 없는 허공에 고개를 저었다. 불특정하고 적당히 특정한 다수를 위하여 고인은 십일 년을 헌신했다. 그러나 그 대상에 자기 자신은 끼어 있지 않았다. 그런 방식은 모험가와 무섭도록 닮아 있었는데,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만은 정반대였기 때문에 모험가는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할 구석이 있는 거였다.


오르슈팡.


성도에 머물면서 조금 더 비슷하게 모방하게 된 이슈가르드 악센트는 그의 이름에서 허무와 같은 날숨이 새게 했다. 마지막 음절에 섞인 비음조차 막지 못하는, 얼어붙은 도시다운 겨울 바람이. 다만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나면 그 주인만이 재해를 겪지 않은 볕처럼 웃곤 했다.


‘네 외지 발음도 아주 좋았지만, 점점 이 성도를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아 기쁘다.’


반대로 모험가의 이름을 말할 때는 제 모국어 특유의 발음을 피하려고 애쓰던 것이 그의 다정함이었다. 모험가는 기억도 안 날 만큼 수많은 지역과 수없는 민족을 거쳐 왔으므로 제 발음을 따라할 건 없다고 말렸지만, 그냥 그는 언제나 그랬다. 오르슈팡이 말하는 것들 중에 외국어와 같은 것은 모험가의 이름이 거의 유일했다. 입 안의 특별한 곳을 울리는 감각은 어떤 약속보다도 선명해서, 모험가는 자기 이름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추위가 걷히면 다른 추위가 깔리는, 이 색조차 없는 땅에 태어났으리라고는 상상되지 않는 사람이다……. 모험가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


한참을 아무 것도 안 보이는 하얀 공간을 노려보다가 막 돌아서려고 했을 때, 모험가는 있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

잘못 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맞다 틀리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거기에 어떤 감정의 이름을 붙일 틈조차도. 다만 모험가는 눈앞의 광경에 숨을 급히 삼키다 호흡이 멈춰 버렸고, 공기가 흐르지 않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름을……, 부를 수가, 불러도 되는 건가?

언 땅을 밟는 쇳소리가 딱 그만큼의 보폭으로 움직여서 절벽 앞에 섰다. 푸르스름한 은발의 엘레젠이 그 자신의 묘비 너머에 우뚝 서, 등줄기를 곧게 편 채 눈만 움직여서 아래를 굽어보았다. 안개에 휩싸인 성도는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왔음에도 여전히 꿈 너머였다. 그 코끝에서 퍼지는 하얀 김이, 그런 적은 없었지만, 담배 연기처럼 보일 정도로.

한참을 발이 붙은 듯이 쳐다보고 있었더니 그……가 돌아보았다. 찰깍 하고 검날이라도 겨누듯이 시선을 보내서, 모험가는 그대로 눈을 통해 뒷머리까지를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가 마침내는 천천히 걸어, 저벅, 저벅, 철컥, 철컥, 얼음땅과 쇠로 된 밑창과 사슬과 철판 같은 것들이 서로 부딪히고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모험가와 겨우 일 플름의 간격을 두고 서기까지.


오르……,


첫 번째의 모음을 미처 닫지 못하고 모험가는 그 이름을 완성하는 것을 포기했다. 다만 벌벌 떨리는 손을 뻗어 그 사슬갑옷 끝에 손가락을 댔다. 일부러 고개를 들어올리지 않으면 모험가의 시선은 바로 그 가슴께를 보게 되는 높이에 있다. 사슬의 구멍 한 칸을 훑는 자기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바짝 깎아서 빨긋하게 피가 번진 자기 손톱 끝을 보았다. 차마 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식 내부의 깊은 곳 어딘가가 이미 결론내리고 있다. 이건 확실히…….

그가 살짝 입술끝을 올리며 손을 내밀고, 가만히 모험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머리 위를 가만히 스친 날숨은 출처에 대한 의심을 날려 버리는 호의였다. 모험가는 파들파들 떨리는 숨을 억지로 내쉬면서 그 손의 감촉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긴장으로 굳은 몸은 감각이 없어져만 갔다. 제발. 어렵게 의식을 쥐어짜서 손가락 대신 손바닥을 대 보았더니, 이번에는 그가 양팔을 들어 안아 준다.


제발.


정말 모르겠다. 그의 존재를, 마치 정말인 것처럼, 만끽하기 위해 너무 긴장한 거다. 이마가 익숙한 그 갑옷의 가슴 부분에 닿았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등에는 역시 익숙한 건틀릿 안쪽이 닿는다. 그런데도, 몸을 이루는 것들이 얼다못해 다 터져나가는 중인지 모험가에게 느껴지는 것은 얼얼한 무감각뿐이었다. 중상을 입었을 때 맞던 독한 마취처럼.

입을 벌린 것은 뻐근하게 막혀서 삐걱이는 폐부에 숨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거짓말 같은 공간에는 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언 바람만 할퀴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럴 때 너는 뭐라고 말했었는지,

그리고 나는 뭐라고 말했었는지.


이전까지 들어 온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한다. 생전에 오르슈팡이 어느 날의 무엇을 보고 뭐라고 말해 주었는지 일일이 떠올리기도 쉬운 몸이다. 하지만 모험가는 오늘의 자신에게 그가 뭐라고 말해줄지, 그것만큼은, 구현해낼 수가 없었다.

자신과 오르슈팡은 기지와 성도와 대륙과, 친구와, 자신들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스스로를 돌보는 법은 몰랐다. 작은 위안이 있었다면 자신 밖의 타인인 서로를 쓰다듬을 줄 알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네가, 너는 내가 사랑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도, 그나마도 되돌려줄 수가 없다. 어쩌면 그를 알았던 시간 내내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사슬이 철렁이는 소리와 함께 등을 어루만지는 걸, 마주 안을 용기조차 못 내고 있듯이. 모험가는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자기 이름을 다시 한 번 내던졌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 * *


눈을 뜬 것은 주인 없는 전진기지의 스산한 방에서였다. 모험가가 처음으로 마음을 허락한 눈의 집은 정말 제 집처럼 익숙한 것들로 가득했지만 감각에 닿는 모든 것이 낯설게 까끌거렸다.

섭리의 땅, 가장 높은 곳에서 과호흡을 일으킨 채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알피노와 옆에서 눈물을 참다가 닦다가 하는 타타루마저도 어느 순간에는 단지 다른 개체의 생명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알피노는 모험가를 위로하려고 애를 썼다. 자네, 좀더 마음 편히 쉬었으면 좋겠네. 스스로를 너무 지치게 했으니 기절해 버린 게 아닌가. 하지만 자네 곁엔 우리가……,


“그랬겠지.”


그는 가만가만 천장만 보며 말했다.


“말 한 마디 안 했으니까. 좋은 꿈은 아니었어.”


알피노는 뭔가를 말하려고 어색하게 입을 뗐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림자가 그대로 물든 듯 눈가가 꺼진 채 또 새로운 상처를 몇 군데 동여맨, 그야말로 환자에게 건넬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네가 쓰러져 있던 곳에 부자연스러운 에테르의 흐름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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