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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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14

haz 02

motschi 2017. 4. 27. 17:51




그가 강하게 주장할 줄 아는 것은 '졸리니까 이만', '오늘은 쉴게', '안 갈래'와 같은 것들밖에 없었으므로,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어떤 힘을 갖게 된 자로서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험가님, 좀 도와주세요. 당신이라면 쉽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거기에 '난 모험가가 아니야'라고 몇 번이나 속으로 대꾸하면서도, 그는 투박한 금속 부츠 따위를 끌면서 각종 잡일에 끌려 나가곤 하는 것이었다. 달리 뿌리내린 곳 없이 이리저리 밀려 다니는 생활을 보고 모험이라고 이름붙인다면 또 그럴 만도 했다. 오늘 나의 방황은 누군가의 그리던 내일의, 이야기 속의 용병 같은 낭만이렷다. 최소한 모험가로서의 장비는 울다하의 여관에서 호의로 건네 준 가죽신보다는 발이 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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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신이라니, 이프리트라니, 그거 듣기만 해도 벌써 뜨거운데. 전설쯤이나 된다고 생각한 먼 개념을 맞닥뜨린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몇 쌍의 눈에 얼른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지하에 자리한 이 비밀 결사가......, 어째 웅성웅성한다 싶더니 (물론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다) 결국 그에게도 정식으로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저기, 나는 그냥 마물 게나 쥐 같은 걸 몇 마리 잡아다 주고 그랬을 뿐이잖아. 어떻게,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큰 일을.
혈맹의 중심인 이 현자라는 인물들은 꼭 그를 데려가려고 했다. 그는 그 지하 방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피로감을 느꼈다. 마지못해 외운 마법주문 몇 줄로, 그래, 너희 말로, 영웅 행세를 할 수 있겠냐고. 그가 자신을 믿지 않듯 그는 사실 주변도 믿지 않았다. 주점에 앉아 있으면 자주 들려오는 이야기인, 탐사나 토벌을 나갔다가 소식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가 아니라, 당신들과 나도 그런 꼴이 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고 사실상 가졌던 것도 없었으므로, 의식적으로나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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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온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뜨거운 땅은 더 이상 밟고 싶지 않다. 사막에는 댈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싸움은 시작되었으므로 그는 허리 양쪽에 약병 몇 개를 매단 채 쉴새없이 마법 화염구와 얼음 화살 따위를 만들어냈는데, 주문을 외우려고 입을 열면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가 밀려들어왔다. 아지랑이가 눈앞을 흐리게 했다. 폭발에 아주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옷이며 머리끝이 살짝 타고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역시......로 시작하는 찬사의 말이 몰아쳤다. 누군가는 등을 철썩 때리고 술을 권하고,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크고 멋진 말을 퍼부었다. 거기서 몇 걸음 떨어져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자신뿐이었다. 그는 주는 대로 잔을 받고 간혹 따라 웃었지만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오래도록 굳어진 무기력에 짓눌린 혼란은 그 자체로는 폭이 크지 않았으므로, 그의 안에서 억양 부족한 제 목소리가 가만가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도대체.
그가 한 것은 주문 몇 개를 터뜨린 것뿐이었다. 야만신의 체력의 일부를 빼앗기는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토벌이라고 할 만큼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는 할 수 없다. 오직 그만이, 어떤, 그러니까, 성취감 비슷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성취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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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땅에서 그 만남이 있기 전까지, 그는 영원히 죽지 못해 살거나 죽으리라고 생각했다. 끝을 맞기 위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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