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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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이즈] 크리스마스 스케줄에 대하여

motschi 2016. 11. 5. 23:20



도시는 바람이 조금 차가워진 것만으로도 금세 온 구석구석을 전구투성이로 만들어 버린다. 색색깔의 빛이 어디 눈을 피할 곳도 없이 곳곳에서 반짝거린다. 이제 크리스마스구나, 하고 회상에 젖은 눈을 하기에는 일렀다. 아직 유메노사키 학원을 포함한 학교들은 한창 학기 중이고, 학생들도 춘추복인 블레이저를 입었을 뿐 겨울의 기색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상점들도 일루미네이션을 닮은 전구를 둘렀을 뿐 아직 캐럴을 틀지도 않았다. 겨울에 가까운 것은 아이돌 유닛의 행사 계획뿐이었다.


“진심이야? 치아 군 주제에?”

“으으, 세나……. 나는 유닛 스케줄도 생각해야 하니까…….”


나이츠가 크리스마스에 스케줄이 없는 건 맞다. 유성대와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건 유성대지 나이츠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껄끄럽게도 이즈미가 한가할 때 치아키가 바쁜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건 어떻게 생각하면 딱 그 정도의 일이었지만 이즈미에게는 좀 서운하기도 한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누가 라이브를 해?”


하필 행사가 잡힌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그것도 테마파크에서였으니까.

웬만하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히어로 쇼로서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의 테마파크라는 조합은 엄청난 행운일지도 모른다. 유메노사키에서 함께 3년째를 지내면서 유성대가 갖는 그런 행사의 기회가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이즈미가 모를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작년이었다면 이즈미는, 겉으로는 상냥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순수하게 축하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미안! 같은 단호할 만큼 깔끔한 한 마디로 이즈미의 제안은 각하되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세나 이즈미가 큰 맘 먹고 꺼낸 말이었다는 점에서 그 반향은 컸다. 치아 군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고 말을 꺼내기까지도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가. 자존심의 문제를 떠나, 어린이의 꿈을 챙기기 위해 이즈미의 꿈이 빼앗긴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래! 세나도 OO랜드에 와서 나를 봐 주면 어떨……!”

“아, 정말! 치아 군 내년까지 나 볼 생각 하지 마!”


어떻게든 이즈미의 기분을 회복시켜 보려는 게 티가 나니까, 그 따스함 이상의 마음에 이즈미는 더 짜증이 났다. 치아키는 유닛 컨셉 상 어린애들을 자주 대하고, 그 자신도 꿈과 희망을 지키는 히어로라는 의식이 강하다. 그러니 이즈미를 대할 때도 ‘모든 어린이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듯한 느낌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떤 어린이 한 명이라도 울어버리지 않도록. 세나 이즈미는 이제 열여덟 살이었고, 그런 어린애들과는 달리 자신이 중심으로써 다루어지는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 때 짜증을 내며 돌아서버릴 줄도 알았다. 내년까지는 별로 긴 시간도 아니지만.


“세나, 세나!”


팩 돌아서고 몇 발짝 걷지 않아 다급하게 쫓아오는 치아키의 당황한 목소리는 딱히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이즈미는 그 정도로 멈춰 주지 않고 내심 흥, 하고 아직 남은 불만을 곱씹었다. 치아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좀 울 것 같이 물기에 젖을 때까지.


“세나를 못 보는 건 싫다!”

“짜증 나! 유닛 연습이나 하러 가!”

“세나가 안 봐 주면 기운이 안 난다!”


자칭 히어로 모리사와 치아키, 스턴트 배우 모리사와 치아키. 그 악력이며 쥐어짜는 팔힘은 이즈미가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허리에 매달려서 두 팔로 꽈아아악 안는 힘에 이즈미는 순간 으윽 하고 아이돌답지 않은 소리를 낼 뻔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정말로 윽, 하고 질린 신음소리를 터뜨렸다. 치아키가 눈물 콧물이 당장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은 얼굴로, 그리고 날카로운 말 한 마디라도 건네면 바로 이즈미의 옷자락에 부벼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세나가 없으면 안 된다!”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끝나고 세나를 만나야 하잖아! OO랜드 리조트 예약할 테니까!”

“엑…….”

“세나아아아아!”


아무리 생각해도 즉흥적인 대처 같지만, 사실 동하지 않았다고도 못 하겠다. 이즈미는 허리에 매달린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유성대 대장을 내려다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짜증 나. 이 표정은 꼭 과자를 빼앗긴 카사 군 같잖아. 그럼 치아 군이 빼앗긴 건 뭐람. 물을 것도 없이 세나 이즈미다.


“치아 군, 알겠으니까 코 닦으면 안 돼?”

“으응, 미, 미안하다.”


이즈미가 제지하기도 전에 블레이저 소매로 눈가를 쓱쓱 문지르더니 코 밑으로도 움직인다. 그러고는 비 갠 뒤 무지개 같은 웃음을 짓는다. 반짝반짝 촉촉한 곡선에, 이즈미는 그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치아키가 그 소매 그대로 다시 이즈미의 허리를 꽈악 끌어안는 데에도 저항하지 못했다.

계절은 아직 겨울이 되기 전, 낮도 그렇게 짧아지지 않은 기획의 주간이다. 나이츠는 앞으로 바빠질 수도 있지만, 이즈미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일정만은 확정해 두기로 했다. 그 날은 유성대의 라이브를 모니터링하고……, 묻지 마, 짜증 나. 사생활이니까. 아무튼 세나 이즈미는 바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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