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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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치아] 모리사와치아키 유루캬라 키트

motschi 2016. 10. 20. 00:01




   여덟 살도 아니고 열여덟 살이다. 무릎에 상처딱지를 달고 그 위에 또 상처를 내고, 한낮에 아스팔트에서 넘어져 구른다니 이유가 있어도 한심할 뿐이다. 누굴 구하러 가기 전에 자기 몸부터 챙기시지. 상처투성이 정의의 편 레드의 팔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미도리는 짜증을 냈다. 자기 역시 (타의로 시작했다고는 하나) 정의의 편이라는 건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치아키는 남, 그러니까 미도리도 포함해서, 남만을 바라봤다. 붙들린 팔꿈치에도 벌겋게 까진 상처가 겹쳐 있어, 미도리가 잡아끄니까 으악 소리를 치는 주제에.


“아프니까 살살 해라, 타카미네!”

“아플 짓을 하지 말았어야죠.”


한심해, 진짜. 치아키의 상처에서는 잠시간의 충격 후에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해, 들여다보던 미도리가 다 아파서 죽고 싶었다. 아까 저쪽 수풀에서, 고양이가 말이다, 하고 주섬주섬 주워섬기는 변명도 안 들린다. 붙잡은 팔을 신경질적으로 당겨서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우선 상처를 씻어야 했다. 주절주절 발성도 당당하게 떠드는 걸 그냥 붙잡아서 수도꼭지를 팍 여니까, 목소리는 그대로 비명으로 이어졌다.


“으아아아! 타카미네!”


아 물 좀 살살! 너는 타카미네로 변장한 악당인가? 팔꿈치의 상처에 센 물줄기가 떨어진 탓에 치아키는 눈물까지 찔끔하며 소리쳤다. 미도리가 대충 상처를 씻어내고 수도꼭지를 도로 잠근 뒤에도 불평불만은 멈추지 않는다. 이미 미도리에게 ‘타카미네의 얼굴을 잘도 따라한 악의 무리’라는 설정을 덮어씌우고 상황극에 들어간 뒤다.

아마 반대의 경우였다면 치아키는 자기가 악역이 된 데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도리는 그런 건 어떻든 관심이 없었으므로, 대꾸 없이 휴지를 뜯어와 물기를 톡톡 걷어내기만 했다. 손 안에 붙들린 팔뚝이 움찔하고, 이어서 미도리가 옆으로 멘 가방을 뒤져 작은 파우치를 꺼내자 시끄러운 상황극 대사가 뚝 그쳤다.

안즈가 구해다 준 극세사 인형 파우치 안에는 소독약과 연고, 밴드 같은 것들이 오밀조밀 들어가 있다. 치아키는 활동량이 많은 만큼 자주 다치는데, 미도리는 운이 없게도 그 활동량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하는 입장이었다. 정말, 운도 없게. 구르고 떨어지고 미끄러지는 치아키를 부축하거나 업고 보건실로 옮기는 것도 미도리의 몫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농구 코트 바닥에 쓸리는 순간이 미도리가 꼽는 최악의 부상이었다.) 게다가 높은 확률로 보건실은 ‘외근 중^^’ 같은 포스트잇이 남겨진 채로 비어 있다.


‘죽고 싶다…….’


그러니까 그 꼴을 보느니 직접 치료하는 게 나았다. 미도리는 부상이래봤자 기껏해야 종이에 손가락을 베든지 하는 게 전부니까, 이 파우치는 온전히 모리사와 치아키를 위한 구급 키트인 셈이다. 이런 걸 챙기게 됐다는 사실이, 그리고 결국 이걸 치아키 앞에서 꺼내야 한다는 사실이 미도리를 우울하게 했다.

이걸 내가 왜. 죽고 싶다, 가능하면 부상은 아닌 걸로. 미도리는 불만을 중얼거리면서도 치아키의 팔꿈치를 소독하고, 약지로 연고를 살살 문지르고, 알록달록한 캐릭터 밴드까지 붙이느라고 바빴다. 그래서 치아키가 평소와 달리 입을 다물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뭠까.”


말 없이 미도리만 빤히 보고 있다는 것도. 밴드 두 개를 나란히 붙여서 상처를 막고 팔을 놓아 주는데, 치아키는 여유 있게 걷어올리느라 구겨진 소매를 펼 생각도 안 한다. 웃지도 않고 떠들지도 않으니까, 새삼 동그랗게 뜬 눈이 제법 크구나 싶다. 입만 다물면 얼굴은 멀쩡하다, 고 미도리는 여러 번 말했지만 이제 보니 동안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굴은 왜 그럼까, 죽고 싶어…….”


낯설게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을 줄도 안다. 물러서지 않는 정의의 히어로면서 커다란 눈이 미도리를 봤다가, 화들짝 떨어져서 인형 파우치를 봤다가, 자기 팔의 캐릭터 밴드를 봤다가, 아무튼 목소리만큼이나 요란하고 산만하게 방황했다. 귀가 새빨개져서. 그래서 미도리는 짧은 사이 세 번째로 죽고 싶어졌다.


“고고고고맙다타카미네준비성이좋구나!”

“뭐?”


사례하지! 내일보자! 이상한 리듬으로 말을 투다다다 쏟아낸 치아키는 미도리의 손에서 벗어나서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금 다쳤으면서 무섭지도 않은지 또 뛴다.

치아키가 이상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아주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었다. 치아키가 밑에서 불이라도 땐 듯이 벌개졌다가 날아가버린 것처럼, 미도리도 귀끝이 뜨겁게 느껴졌으니까. 아직 닫지도 않은 파우치와 함께 남겨진 미도리는 네 번째 한탄을 입 안으로 삼켰다.


“타카미네!”

“으아아!”


간 줄만 알았던 목소리가 갑자기 이름을 불러서 미도리는 펄쩍 튀어올랐다. 순간 놀라서 파우치를 꽉 쥔 채로 고개를 돌려 보니, 화장실 문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치아키가 있었다. 아직도 귀가 벌개 가지고. 미도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곳을 찾았지만 이제 와서 개별 칸으로 들어가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대신 발만 움직여서 한 발짝 물러섰다.


“아까 악당이라고 한 거 미안하다! 타카미네는 정의의 편이야!”


목소리는 여전히 리듬과 억양이 이상하지만 아주 조금 원래대로 돌아와 있다. 그 말을 하려고 돌아왔던 건지, 치아키의 머리가 다시 쏙 사라졌다. 이어서는 또 막 뛰어가는 발소리. 오늘은 미도리와 이대로 헤어질 생각인 것 같다. 물론 치아키가 그 정도니까, 미도리는 한나절은커녕 최소한 한 달은 그 얼굴을 못 대할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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