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날

haz 03 본문

FF14

haz 03

motschi 2017. 5. 26. 03:03



슬픔, 좋다. 그런 것이라도 있었던 날이 좀더, 낫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그에게는 지금 아무 것도 없다.


......라는 것을 입 밖에 낸 적은 없다. 그의 작고 어린 친구들이 들으면 서운해할 테니까. 하지만 존재감보다는 상실의 크기가 더욱 큰 법이다.



-



그는 울지 않았다.

언젠가는 입술이 열로 얼얼해질 만큼 물어뜯으며 참은 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제는 정말로 어떤 감각도 스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는 그저, 눈에 띄게 어깨를 늘어뜨리는 아이메리크에게 보이기 위해 미소지었다. 천 년의 역사를 끌어내 패대기친 이슈가르드의 권력자는 믿을 수 없게 강인했다가도 사소한 곳에서 알기 쉽게 초조해한다. 오랜 친구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는 지극히도 덤덤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험가가 제 말에 얼른 웃어주지 않으면 실의에 빠진다. 야망에 차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니 연기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만.


"자네 같은 얼굴을 내가 몇 번이나 봤을 것 같나?"


입꼬리를 마지못해 올렸을 뿐인 것을 아이메리크도 안 것 같다. 모험가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기에는 너무 지쳤다.



-




"오르슈팡 경은 나도 몇 번 만났어."


절대 입에 올리지 않고 들을 리 없다고 생각한 이름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멎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굳어 바스러졌다고 생각한 것이 우습게도 금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것도 폭풍을.


"소중한 것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하더라."


그게 너였구나, 하지란. 오 년이 지났어도 한 점 변함이 없는 그 볕과 같은 미소에 그만 눈을 감게 된다. 눈이 시리다. 




-




하지란, 네가 보려고 하지 않아서 그래. 왜 아니라고 해? 네가 느끼는 걸 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질책하듯이 등줄기를 눌러 세우는 데에 그는 고개조차 저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냐, 안 그래. 정말 모르겠어. 이런 상황에는 슬퍼야만 한다고 배워서인 게 아닐까? 슬픈 게 아니라, 슬퍼하는 걸 보여 줘야만 하니까? 그럼 난 안 슬픈 거 아닐까, 사실은 아무 것도 소중하지 않아서...


아니야, 하지란. 울고 있잖아.




-



네가 어렸을 때는 이 땅도 멀쩡, 아니, 평범, 아니, ...... 아무튼 풀이나 뭐 그런 게 잔뜩 있었겠네.

그리다니아와 인접해 있었을 테니 기후도 비슷했을 것이다. 푸른 것이라고는 금속의 형형한 반사광뿐일 듯한 이 돌의, ......눈의 도시가. 오르슈팡은 이슈가르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가 성도의 울퉁불퉁한 돌 바닥을 밟는 것만으로도 함박웃음을 짓곤 했으므로 일부러 말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그렇게 넣어둔 말은 예상치 못하게 에스티니앙 앞에서 튀어나왔다. 그 목초지가 불타다못해 지도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들었으면서. 차라리 오르슈팡에게 말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곧이라도 늘어선 돌기둥에 머리라도 박을 듯이 낭패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에스티니앙은 혀를 차 보였다.


"있었지, 양을 쳤으니까. 네 고향도 그 근처일 텐데, 멍청한 소릴 하네."


에스티니앙이 평소와 다름없이 시비를 걸듯 이를 드러내서 그는 조금 안도했다. 따지자면 고향은 아니고, 그나마도 그 곳이 사라지기 전에 그가 먼저 사라졌었다. 마법도 쓰는 애가 왜 그렇게 멍청하냐? 에스티니앙은 한 발 앞서가면서 투덜댔다.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라서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아마 목적으로 하던 곳에 도착하면 서로에게 술이나 한 잔씩 더 권하게 될 것이다. 아이메리크 돈으로.



-



뚝 잘려진 오 년을 꽉 채워 산 건 아니니까 굳이 제6성력 언젠가에 있는 생일로부터 정확히 세려고 하지 않는다. 스물일곱인 채 오 년 뒤로 날아갔다고 서른두 살이 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가끔 친구와 시비가 붙으면 마지막의 마지막 치사한 시비거리로 그것을 썼다. 그러면 에스티니앙은 들은 척도 하지 않거나 코웃음을 쳤고, 오르슈팡은 "이유야 어떻든 지금 우리가 이렇게 또래가 되었으니 얼마나 좋냐"며 입을 턴 게 미안해질 정도로 기뻐했다. 아이메리크에게는 그런 사실을 말해 줄 기회가 없었으므로 뒤늦게 알고는 좀 서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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