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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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삼] 유키, 병원 가자

motschi 2015. 4. 18. 15:25



  2008년, 조금 추워진 어느 가을날. 

  카사마츠는 또 배가 아팠다. 아니, 아프다고 했다. 

  농구부 연습을 하루 쉬고 학교에서 지정한 병원에 가서 예방접종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고 나서부터였다. 독감 같은 거 걸려서 한심하게 연습 빠지면 안 된다. 한 명도 빼놓지 말고 주사 맞고 와. 감독도 3학년 주장도 그렇게 당부했다. 

  카사마츠는 7교시 수업이 끝나갈 때쯤 안색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지더니 점점 앞으로 엎어져서 종례 시간에는 아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옆 분단 조금 뒤쪽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모리야마는 코보리에게 슬쩍 눈짓했다. 쟤 왜 저래. 코보리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입술만 움직여 보였다. 뻔하지 뭐. 

"카사마츠, 뭐해? 종례 끝났어." 

  종례가 끝나고 학생들이 짐을 챙겨 교실을 나가는 소란 속에서도 카사마츠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져만 있다. 배를 끌어안듯이 해서 무릎 위로 교차한 양 팔이 늘어져 있지 않은 걸 보니, 잠든 건 아니다. 코보리는 웅크려서 작아진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걸었다. 카사마츠는 책상에 이마를 댄 채로 교실 바닥에 대답을 떨어뜨렸다. 울먹이는 목소리. 

  "배 아파..." 

  "배가 아파?" 

  모리야마가 어린애에게 하는 말 같은 억양으로 되물었다. 자기도 카사마츠의 뒷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으면서, 코보리를 쳐다보고 씨익 웃는다. 둘이서 생각했던 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답이었던 것이다. 모리야마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눌러 참고 짐짓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어떡하냐, 아파서. 

  "또 신경성이지?" 

  "......집에 가서 쉬면," 

  "아냐, 카사마츠. 병원 가자." 

  "왜?!" 

  친구들에게 얼굴도 안 보여 주나 싶더니 코보리의, 병원이란 말에 퍼뜩 고개를 든다. 울려다 말았는지 눈이 좀 촉촉한 걸 보니, 배가 정말 아프거나(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그에 준하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스트레스가 뭔지는 뻔했다. 코보리는 빙긋 웃었다. 

  "어차피 병원 가야 하니까. 진찰 좀 받아 보자." 

  "......진찰?" 

  "어디 안 좋은 거면 어떡해? 이번 기회에 피검사 같은 것도 받아 보자." 

  "피검사?!" 

  야, 괜찮은 거냐 저거. 모리야마가 눈짓하는데, 일부러 카사마츠를 겁주는 말을 하던 코보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카사마츠를 일으켰다. 어깨를 안아 올리자 카사마츠의 동공이 커졌다. 소리가 나는 거라면 달각달각 떨리는 소리가 날 것도 같다. 

  "나, 나 안 아파." 

  "지금 안 아파도 또 아플 수도 있잖아. 가는 게 좋겠어." 

  모리야마까지 한 마디 거들자, 카사마츠는 정말로 울 것 같은 얼굴이 된다. 예방 주사와 채혈 검사. 어느 것을 선택해도 똑같다. 얄팍한 핑계로 빠져나가려다 궁지에 몰려 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스트레스로 진짜로 배가 아플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2학년에 한 명 있는 레귤러를 독감에 걸리게 둘 수도 없다. 윈터컵이 코앞인데. 카사마츠는 인터하이에서의 실수를 만회하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 그런데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지, 시즌별로 예방 접종이나 건강 검진 때가 되면 늘 이 모양이다. 물론 모리야마와 코보리가 그냥 넘어가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야 너네, 아직도 출발 안 했냐. 혹시나 해서 와 봤더니..." 

커다란 목소리에 돌아보니, 3학년인 주장이 교실 문 프레임에 걸쳐 서 있다. 그는 한심하다고 말하는 듯한 눈으로 잠깐 세 명을 바라보고,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한 발 한 발, 가까워질수록 카사마츠의 얼굴에 공포가 떠오른다. 

  "카사마츠. 또 안 간다고 버티고 있지?" 

  "가, 갑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선배 말은 절대적이다. 카사마츠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확 바뀐 태도에 모리야마는 입을 삐죽였다. 우리는 이렇게 고생시켜 놓고. 주장은 그렇다는 걸 금세 알았는지, 느릿느릿 가방을 챙기는 카사마츠의 허벅지에 가볍게 니킥을 먹였다. 

  "얘들이 네 형이야? 고생시키지 마. 내년엔 어쩌려고 그러냐." 

  "죄, 죄송, 합니다..." 

  "주사 제대로 맞고 와." 

  "네..." 

  주장이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도로 성큼성큼 교실을 나갔다. 그 박력에 억지로 대답해 버린 카사마츠는, 종말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이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이럴 때는 적절한 당근이 필요했다. 궁지에 몰린 카사마츠는 어느 정도 손만 내밀어 주면 덥석 붙잡아 버리니까. 

  "주사 맞고, 크레페 먹으러 갈까?" 

  "응..." 

  "배 아픈 거 아니었어?" 

  "안 아프다고!" 

  까짓 거, 가자. 카사마츠는 결심 가득한 얼굴로 앞장섰다. 모리야마와 코보리는 웃음이 터져 버려, 서로의 옆구리를 붙잡고 참았다. 여기서 웃어 버리면 도로 안 간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 남자다운 차기 주장 같은 얼굴로 병원까지 간 건 좋았지만, 카사마츠는 주삿바늘을 보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의사는 카사마츠의 얼굴이 기억났는지 소아 환자를 대하듯 유아어로 달래고, 코보리는 카사마츠의 얼굴을 제 품에 묻어서 안고, 모리야마는 카사마츠의 정신을 딴 데로 돌리려고 열심히 떠들었다. 카사마츠뿐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창피해질 만한 상황이지만 달리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 모리야마와 코보리가 주사를 맞는 건 쳐다보지도 못했다. 

* 배 아프단 소리는 예방 접종이 끝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 생크림 바나나 크레페에 초코시럽을 엄청나게 올리자 이것은 보상이라는 느낌이 여실히 묻어났다. 카사마츠, 배 아프다며?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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