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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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

[쇼리] Rain!

motschi 2014. 9. 14. 01:53


아침에 좀 습기가 차는 듯하더니 점심쯤부터 비가 왔다.

 

우산을 안 챙겨온 것도 문제지만, 날이 습하니까 정말 딱 죽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났다. 머리카락은 빗어도 빗어도 여기저기 꾸불꾸불해져서 말려 올라가고, 기분 때문이겠지만 몸도 좀 처지는 느낌이다. 여름방학 중의 보충수업은 정규수업보다도 더 가혹하게 느껴져서 완전히 진이 빠졌다. 교실에 틀어 둔 선풍기 바람 정도로는 습기가 걷히지 않는다. 게다가 수업이 다 끝난 빈 교실은 적막해서 어딘가 더 묵직한 기분. 공기에 어깨를 꾹꾹 짓눌리는 느낌에 나는, 결국 굴복했다. 책상에 반쯤 엎드려서, 앞자리에서 프린트 한 장에 집중한 남자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지켜봤지만 훌륭하게 어깨가 넓어져서, 이제 제법 멋있어진 실루엣이다. 남방처럼 풀어헤친 까만 교복 상의와, 똑같이 새까만 뒷머리. 딱 학생답게 단정한 머리는 지금 습기로 난리가 난 내 머리카락과는 달라서 슬쩍 기분이 상했다. 나는 일부러 손가락을 세워서 그 등을 쿡 찔렀다.

 

"왜?"

 

안경 너머로 눈썹을 찡그리며 그가 돌아보았다. 오늘 나온 숙제는 내일 바로 제출이니까, 지금 빨리 끝내고 가자고 말한 건 나였다. 말한 그대로 그는 갱지 프린트와 교과서를 교대로 읽어가며 숙제에 집중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니야."

 

반면 나는 프린트 맨 위에 이름을 쓴 뒤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 프린트를 한번 쓱 내려다보더니 그래? 하고 다시 자기 숙제로 돌아갔다. 나는 아예 책상에 푹 엎드렸다. 분명히 오늘 수업 들은 내용이고, 나도 못하지는 않는 과목이다. 그런데 갑자기 첫 문항부터 전혀 모르겠다는 느낌뿐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의식의 반이 어디로 날아가버린 것인지, 문항을 이루고 있는 말들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이거대로 짜증스럽고, 눈앞에서 슥슥 샤프 소리를 내면서 숙제를 해나가는 걸 보고 있는 것도 짜증났다. 게다가 밖은 빗소리로 가득하고.

 

간혹 이런 날이 있다. 아주 사소한 게 조금만 틀어져도 정말 세상에 내 편이라곤 없는 듯한 기분에 빠지는 날.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책상과 팔로 가려진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야. 한심해. 싫어. 그래서 앞자리에서 손이 다가와 내 뒷머리를 톡톡 건드리는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뭐야 진짜, 건드리지 마.

 

"너 숙제 안 할 거면,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기다려."

"..."

"지금 집중 안 되면 굳이 지금 할 필요 없잖아."

 

이 사람은 진짜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오늘의 기분으로는 그것도 영 기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나는 대답만 안 했을 뿐, 시키는 대로 그가 내 책상에 올려준 그의 아이팟을 주섬주섬 챙겼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그가 등교길에 듣다 만 부분부터가 흘러나온다. 가늘고 높은 여자 목소리. 이제 놀랍지도 않다. 또 무슨 애니메이션 노래겠지, 그것도 여자애들 잔뜩 나오는 거. 쭉 듣다 보니 하도 많이 들어서 알게 된 노래도 나온다. 케O온 오프닝 이건 몇 년 전부터 들어 있던 건데.

 

시부야 쇼리의 취미생활을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시부야가 아닌 사람은, 나뿐이다. 

 

 

"가자."

 

또 뒷머리를 톡톡 쳐서, 이번에는 고개를 들었다. 이어폰을 빼고 아이팟을 건네자, 대충 가방에 밀어넣는다. 그가 숙제를 끝낸 건지 어떤지는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 나도 별 말 없이 빈 프린트를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밤에라도 할 마음이 생기기를.

 

학교 건물 현관으로 나오자 안에서 보던 것만큼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쇼리가 다행히 우산을 챙겨 와서, 둘이서 하나를 같이 쓰고 학교를 나섰다. 나는 빌리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보다 키가 훨씬 작아서, 우산은 쇼리가 들었다. 우산 위로 굵직한 빗방울이 마구 떨어져 투둑투둑 소리를 냈다. 그걸 멍하니 듣고 있으니까, 쇼리가 답답한 듯이 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다 젖잖아. 좀 더 붙어."

"...쇼-쨩."

"그래그래, 더 붙어야지."

 

쇼리의 교복 자락이 금방 습기와 빗방울을 머금어서 축축해졌다. 내 어깨도 덕분에 조금씩 젖어들기 시작했지만, 아까만큼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찰싹 붙었더니, 그의 가슴께에 반대쪽 어깨가 닿았다. 아아, 체온. 그리고 호흡. 그가 숨을 쉬면서 가슴이 움직이는 게 어깨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페이스에 숨쉬는 것을 맞춰가고 있었다. 직접 느껴지지도 않는데 그의 날숨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저기 들렀다 가자."

 

쇼리가 가리킨 곳은, 하교길에 몇 번이나 여자애들하고 다녔던 디저트 가게였다. 쇼리하고는 한 번이나 갔었나. 굳이 같이 간다면 디저트 가게보다는 카페를 가곤 했다. 그는 단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히려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바로, 동생 생일이라 케이크 사 갈 거야. 하는 말에 그럼 그렇지 하고 납득했다. 하교길에 뭐 베이커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우산 주인이 가는 대로 따라서 가게에 들어섰다. 그는 핑크와 화이트로 꾸며진 가게 내부에 잠시 멈칫했다가, 생크림이 잔뜩 올려진 홀 케익을 주문했다. 초를 13개 부탁하고... 그러고 보니 동생 생일이랬지. 유리 군이 13살이라니, 중학생이라고 벌써?

 

"그리고... 이것도 주세요."

"네, 블루베리 치즈케익이요. 한 조각 맞으세요?"

"네."

"드시고 가실 거세요?"

"네. 그거랑, 아메리카노도 한 잔 주세요."

 

이게 뭐하는 거지.

내가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쇼리는 조각케익과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테이블 양쪽에 각각 놓고, 조각케익 앞에 나를 붙잡아 앉혔다. 나는 멍하니 앉아있다가, 쇼리가 포장된 홀 케익을 가져와 옆 테이블에 놓는 것을 보고, 그대로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치즈케익 좋아하잖아."

 

내 손에 플라스틱 포크를 쥐어 주고, 자기 몫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다. 커피가 뜨거워서 안경에 금방 김이 서린다. 멍청한 모습인데, 좋다.

 

"먹고 힘내서 해. 밤에 전화해서 물어봐도 되니까."

 

아니, 너 밤엔 궁도부 여자애랑 데이트 해야지. 아닌가 그건 엔딩 봤댔나. 오늘 처음으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너 얼굴 바보 같아. 그렇게 말했는데도 쇼리는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자기도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비는 오늘 내로 그치지 않을 것 같지만, 뭐 썩 나쁘지만은 않네.

 

 

 

 

 

 

 

***

 

유리 폐하 강탄기념일에 맞춘 "학원물 합작"에 냈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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