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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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

[콘유] 웰러 경이 가르쳐주는 조음의 기본

motschi 2014. 9. 14. 01:52


"하아ㅡ"

 

 

오늘처럼 볕이 좋은 날 창을 등지고 서류작업이나 해야 한다니. 물론 어제도 그저께도 날씨는 좋았다. 사실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가 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은 어제 피크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어제는 도시락을 챙겨서 신나게 뛰어나가며, 내일 열심히 할게! 하고 장담했지만 막상 그 내일이 오늘로 다가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법이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 열심히 일하니까, 그레타도 옆에서 책 읽을게! 하고 기특하게도 두꺼운 책을 가져와 옆에서 꼬물거리던 그레타가 갑자기 아니시나를 만나겠다며 나가버린 뒤로 권태감은 더했다. 

 

시부야 유리 하라주쿠 불리. 사자성어처럼 늘어선 여덟 자의 한자를 기계적으로 써내려간다. 첫 서명을 잘못한 죄로, 진마국 국왕의 공식 서명은 하라주쿠 불리까지 포함하게 됐다. 이렇게까지 셀프 디스를 잘하는 왕도 없을 거야. 유리는 또 권태감 가득한 한숨을 쉬다가, 자기도 모르게 종이에 셀프 디스라고 서명해 버린 것을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똑,

 

타이밍 좋게 노크소리가 들리고, 유리가 추욱 처진 목소리로 네ㅡ에, 하고 대답하자 금세 웰러 경이 모습을 나타냈다.

 

"폐하, 일은 잘... 안 되고 있군요."

"폐-에-하-라고 부르지 마ㅡ."

"실례, 버릇이 되어서. 유-리, 조금 쉬었다 할까요?"

 

콘라트는 늘어져 있는 유리의 팔 밑으로 서명 대신 '셀프 디스'라고 끄적여진 서류를 보고 실소를 흘렸다. 유리는 비칠비칠 일어나서 감금당한 듯한 얼굴로 콘라트를 올려다보고,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좋은 듯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 책은 뭔가요?"

"아아, 그레타가 읽던 거. 놓고 갔네."

 

콘라트는 붉은 가죽으로 감싼 책을 집어들었다. 어린애가 읽기에는 좀 어려워 보이는걸, 하자 유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으로 더듬어 보건대 언, 어, 학,이라고 써져 있는 것 같았고 그 이하의 용어들은 이해조차 안 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그레타의 장래희망은 천재 언어학 독녀니까. 그레타가 골비족의 텔레파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유리나 콘라트 둘 다 나중에 전해 들은 사실이었다.

 

"나는 첫 장부터 무리인데 말이야. 잘도 이런 걸 읽네."

"첫 장? 어디, 음... 조음의 기본."

 

...die Artikulation. 콘라트의 입에서 낯선 발음이 흘러나와, 유리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치, 치온? 아아, 아티쿨라치온. 목소리를 낼 때 어느 소리를 어디서 어떻게 발음하는지...에 대해서. 라고 적혀 있네요. 콘라트는 책의 첫 장을 읽어 내려가다, 고개를 들어 유리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눈을 깜박거릴 틈도 주지 않고, 콘라트의 입술이 유리의 입술을 살짝 내리눌렀다. 유리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콘라트는 금방 입술을 떼고,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조금 섞여 있다.

 

"양 입술을 이용한 소리는 der Bilabial이라고 하고,"

"...뭐?"

 

이번에도 유리가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입술을 맞대어 온다. 콘라트는 혀를 살짝 내밀어 유리의 입술을 벌리고, 입술 뒤에 감춰져 있던 앞니에 짧게 키스했다. 유리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유리가 밀쳐내자, 콘라트는 빙긋 웃으면서 떨어져 주었다.

 

"이건 die Labiodental입니다."

"콘라드, 도대체..."

"그림을 봐, 아직이야."

 

자신도 모르게 곁눈질로, 펼쳐진 채인 그레타의 책을 내려다보자, 해부학 책 같은데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그림이 있었다. 사람 얼굴 단면도 같은데. 입술, 치아, 혀, 입천장, 목구멍...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콘라트의 손이, 쓰다듬듯이 다시 유리의 뒷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또 입술이 덮쳐왔다. 장,난, 치는거냐?! 하고 머릿속에서 태클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앞의 두 번처럼 놀리듯이 떨어뜨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콘라트가 머리를 놔주지 않았으니까.

 

콘라트의 혀는 유리의 앞니를 지나, 잠깐 치열을 쓸더니 앞니 뒤쪽에 볼록하게 내밀어진 부분을 간질였다. 유리의 어깨가 꿈틀해도 봐주지 않고 간지럽힌다. 그 다음에는 입천장을 한바탕 괴롭히다가 더 깊은 곳, 살이 말랑말랑한 부분까지 침입했다. 그쯤하자 유리는 숨이 막힐 것 같아 손으로 콘라트의 어깨를 잡았다. 뜨거운 숨이 터져서 부끄러웠다. 머릿속에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에서 시작된 거야? 하고 쉼없이 태클 중. 다행히 밀쳐내지 않아도 콘라트는 적당히 입술을 떼주었다. 하지만 곧 유리의 어깨를 안고, 이번에는 뺨에 입술을 맞춰 왔다.

 

"...순서대로 die Alveolar, der Palatal, der Velar, 그 뒤는 der Uvular. 어디인지 알겠어?"

"알, 리가, 없, 잖아..."

 

바로 귓가에서 속삭여 와서, 자신의 뺨이 뜨거운 건지 콘라트의 입술이 뜨거운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유리가 경직된 어깨로 입술을 깨물고 있자, 콘라트는 무릎을 굽혀 유리에게 키를 맞추었다. 그리고는 유리의 가느다란 목울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다, 또 입을 맞추었다. 유리는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굵은 침을 삼키고, 콘라트의 입술이 닿은 채로 목이 꿀렁하고 움직이자 다시 얼굴을 붉혔다. 콘라트는 장난을 끝내고 입술을 떼, 다시 손을 뻗어 유리의 머리카락을 부볐다.

 

"마지막으로 die Glottal...입니다만, 무슨 일인가요? 얼굴이 빨개져서."

"무, 무슨, 짓, 이야, 콘라드!"

"그레타가 읽던 책 내용이 궁금한 게 아니었나요?"

 

빙글빙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유리는 머리를 감싸며 탄식했다. 아아, 어서 일을 해야겠다. 몸 속이 갑자기 열로 가득찬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슬쩍 콘라트를 올려다보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친절하게 웃고 있는 게 분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좀 도와주라고!"

"제가 어떻게? 폐하의 서명이 필요한 일인걸요."

"아ㅡ 진짜!!"

 

저 책을 어떻게든 좀 해봐. 애써 다시 서류 결재를 시작한 마왕폐하는 자꾸 그레타의 언어학 책이 신경쓰여서, 서명 대신 이번에는 쓰기도 생소한 조음이니 발음이니 하는 단어를 써 버렸다. 

 

 

 

 

 

+)

 

 

유리가 망친 서류의 사본을 그웬달에게 부탁하러 가자, 사정도 모르고 한심하게 내려다봐서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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